요절한 전쟁 사진가.
본래 이름은 엔드레 프리드만 (Endre Friedmann), 사진가로서 로버트 카파의 생애는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났습니다. 그는 전쟁을 전문으로 찍는 전쟁 사진가로서, 스페인 내란 중에 일약 유명한 존재로 등장하여 일생동안 카메라를 들고 전쟁터만 누비다가 전쟁터에서 최후를 마쳤습니다.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큰 전쟁터를 두루 누비고 다니며 전쟁의 실상을 카메라에 담은 그는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태인인 그는 1931년 유태인을 탄압하는 독재정권을 피해 독일에서 베를린대학에 다니는 한편 울스타인(Ulstein) 통신사의 암실 담당 조수로 학비를 벌었습니다. 1932년 러시아의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축출되어 망명길에 올랐을 때, 마침 이를 취재할 기자가 없어 대신 나가 취재한 사진이 특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암실 조수로부터 정식 사진기자로 임명되었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다시 유태인 박해를 피해 파리로 떠나 1935년부터는 로버트 카파로 이름을 바꾸어 보도사진가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이 무렵 세계에는 암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라이프」가 창간된 1936년, 드디어 스페인에서 먼저 전쟁이 터졌습니다. 프랑코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내란을 일으켰고, 공화파가 이에 맞서 대항한 것입니다. 그는 이 전쟁에 뛰어들어 최전방으로 갔습니다. 어느 날 공격명령과 함께 공화파의 병사 하나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를 박차고 나가는 순간 머리에 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가까이에 있던 로버트 카파는 이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고 타이밍이 제대로 들어맞아 이 결정적 순간의 장면은 「라이프」지에 실려 온 세계에 공개되었고,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은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평생 전쟁 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운명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찍었고, 1942년까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영국을 거쳐 북아프리카로 그리고 연합군의 전선 이동과 함께 지중해를 건너서 이탈리아까지, 또한 전쟁의 막바지에는 노르망디 상륙과 파리의 함락에 이르기까지 줄곧 전방부대와 함께 일선에서 뛰었습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미국 시민으로 귀화하였으며,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또다시 팔레스티나의 이스라엘 독립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1955년 그가 마지막으로 종군한 싸움터는 인도차이나 전쟁이었습니다. 「라이프」의 요청으로 현지로 달려간 그는 그해 5월 25일 월맹군이 부설한 지뢰를 잘못 밟아 폭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한 살이었습니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전쟁이란 무엇인가?
대개의 경우 전쟁사진은 아군이 적군을 대적하는 입장이며 전쟁이 원래 우리 편과 적이라는 흑백논리만이 통하는 힘이 대결하는 장입니다. 전쟁에서는 무조건 우리 편만이 정당하고 의로운 것이며, 반대로 적은 어디까지나 부당하고 불의하며 괴멸되어야 마땅한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흑백논리만이 존재하고 그 밖의 다른 논리가 끼어들 여지가 있을 수 없으므로 전쟁 사진도 결과적으로 보도의 편향성을 띠게 마련이지만 카파는 적군과 아군이라는 적대관계를 떠나서 인간 본연의 갈등과 마찰을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카파는 전쟁이란 적개심에 불타오르는 충돌이지만,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착한 본성이 배태하고 있음을 직시하였습니다. 그의 전쟁사진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다른 보도사진가들보다 더욱 깊이 전쟁이라는 가혹한 현실과 밀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목격자로서가 아니라 전쟁터에 직접 뛰어든 참전자의 입장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총을 들고 적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 전방 군인처럼 최전선에서 긴박한 상황에 직면하여 절박한 현실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사진은 강렬하고, 보는 이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전쟁에 종군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무모한 행위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은 힘차고 강렬하며 생명감이 넘칩니다. 그는 사진가로서 전쟁터에서 생명의 역동성과 솟구치는 존재의식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에서 끈질긴 생명의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의 사진은 다른 보도사진가들의 다큐멘터리 사진보다 더 직설적이며 현장성이 강하고 호소력이 있습니다.
보도사진계의 개혁, 매그넘(MAGNUM)을 설립하다.
로버트 카파는 보도사진가로서의 업적도 길이 남을 만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보도사진의 유통체계를 뒤바꿈으로써 보도사진의 새로운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존에 수동적으로 편집자의 기획과 지시에 따라 작업을 해야만 했던 사진가들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롭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보도사진이 보다 개성적이고 전문적인 성격을 띠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매그넘의 시작입니다. 로버트 카파의 능동적이며 대담한 성격은 일정한 직장이나 어떤 조직체계에 얽매이기에는 너무나 활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도사진가로 출발한 처음부터 일정한 언론기관에 속하지 않고 프리랜서로서의 독자적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편집자가 주도하는 잡지 제작 체계에 그는 많은 제약을 받아야만 했고 전쟁이 끝나자 1947년 앙리 까르띠에 블레쏭, 데이비드 시무어와 함께 새로운 보도사진의 유통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일종의 사진 원고 은행 격인 '매그넘 (MAGNUM)'을 설립하였습니다. 이것은 잡지 편집자에게서 청탁을 받아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을 마음대로 찍어서 공동으로 모아두었다가, 잡지사들이 필요할 때에 원하는 사진을 사 가도록 하는 일종의 사진 원고 판매의 에이전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공동 테마를 내걸고 합동전을 기획하고 또한 사진집을 출판하여 영향력을 크게 떨치게 됩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그는 이 사진집단의 실질적인 대표로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 이 기구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았으며, 이 기구는 세계를 대표하는 보도사진의 본산으로 평가되게 되었습니다. 로버트 카파는 비록 단명했지만 정력적이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많은 사진들을 찍었으며, 보도사진계에 기여한 공헌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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